이시와라 간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시와라 간지는 야마가타현 출신의 일본 육군 군인으로,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독일 유학을 통해 군사 전략을 연구했다. 그는 만주사변을 주도하여 만주국 수립에 기여했으나, 중일전쟁 확대를 반대하며 좌천되었다. 동아연맹 구상과 세계 최종 전쟁론을 주장하며, 2·26 사건 당시 반란 진압에 참여했다. 종전 후 전범 재판 증인으로 출석했으며, 도조 히데키를 비판하며, 일본의 무장 해제를 주장했다. 말년에는 리쓰메이칸 대학에서 국방학을 강의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저술 활동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만주파 (일본군) - 만주사변
만주사변은 1931년 일본 관동군이 류탸오후 사건을 자작극으로 일으켜 만주를 침략하고 만주국을 수립한 사건이며, 일본 군국주의 팽창을 가속화하고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계기가 되었다. - 만주파 (일본군) - 이타가키 세이시로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일본 제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만주사변과 중일 전쟁 등 일본 제국주의 침략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전쟁 범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 법화계 불교도 - 기타 잇키
기타 잇키는 일본 제국 헌법의 천황제를 비판하고 군사혁명을 통한 국가 개조를 주장한 사상가이자 혁명가로, 그의 사상은 2·26 사건에 영향을 미쳤으며, 진보적인 면모와 극단적인 민족주의적 경향을 동시에 지녔다는 평가를 받으며 2·26사건 연루 혐의로 사형당했다. - 법화계 불교도 - 미야자와 겐지
이와테현 출신의 일본 시인이자 소설가, 동화 작가, 농업기술 지도자인 미야자와 겐지는 불교적 신앙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헌신이 담긴 작품들을 남겼으며 사후 재평가를 통해 일본 문학사의 중요한 작가로 인정받았다. - 일본의 군사학자 - 하타 이쿠히코
하타 이쿠히코는 일본의 역사학자로, 일본 근현대사와 군사 및 전쟁사를 연구하며 난징 대학살,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논쟁적인 주제에 대해 실증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다수의 저서를 저술하여 일본 내외에서 다양한 평가를 받고 여러 상을 수상했다. - 일본의 군사학자 - 아키야마 사네유키
아키야마 사네유키는 러일 전쟁에서 뛰어난 전략으로 일본의 승리에 기여했으며, 해군병학교 수석 졸업 후 미국 유학을 통해 해양 전략을 연구하고 연합함대 참모로서 뤼순항 봉쇄 작전과 쓰시마 해전에서 공을 세운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이다.
이시와라 간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이시와라 간지 |
일본어 이름 | 石原 莞爾 (いしわら かんじ) |
출생일 | 1889년 1월 18일 |
사망일 | 1949년 8월 15일 |
출생지 | 야마가타현 쇼나이 |
사망지 | 다카세 |
별명 | 제국 육군의 이단아 군사의 위재 GHQ가 가장 두려워한 일본인 |
군사 경력 | |
소속 | 일본 제국 육군 |
복무 기간 | 1909년 – 1941년 |
최종 계급 | 육군 중장 |
지휘 | 보병 제4연대 (1933–35) 참모본부 작전과장 (1935–37) 참모본부 제1부장 (1937) 마이즈루 요새 (1938) 제16사단 (교토) (1939–41) |
주요 전투 | 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
상훈 | 금치훈장 3등 욱일장 3등 서보장 4등 |
학력 및 경력 | |
전직 | 릿쓰메이칸 대학 교수 (1941–42) |
기타 정보 | |
묘소 | 야마가타현 아쿠미군 유자 스가사토 |
2. 초기 경력
야마가타현의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난 이시와라 간지는 보신 전쟁때문에 부친이 실직하여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1909년 육군사관학교를 21기로 졸업하였다.[2] 한일 병합 이후 조선에서 근무하였으며, 1918년 장교의 출세 코스인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그는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에서 최상위권의 성적을 거두었으며, 휴가나 방학도 반납하고 독서를 할 정도로 학습에 열심이었다.
이후 참모직으로 일하다가, 1922년부터 1925년까지 독일에 주재무관으로 파견되어 전쟁사와 전략을 공부했다.[12] 독일 전직 장교들에게 개인 교습을 받으며 유럽 전술 이론의 전문가가 되었다.[12] 유럽으로 떠나기 전 니치렌슈(日蓮宗)의 신자가 되었는데, 그 교리에 의해 일본이 다가올 세계 대전 이후의 황금시대에 세계 중심이 될 것임을 확신했다. 그리하여 그는 일본이 황인종의 중심이 되어 백인종의 시대를 종식시킨다고 믿게 되었다.[12]
2. 1. 출생과 가계


이시와라 간지는 1889년(메이지 22년) 1월 18일 야마가타현 쓰루오카 (현 쓰루오카시)에서 태어났다. 호적상으로는 1월 17일생이다. 야마가타현 쓰루오카시의 사무라이 가문 출신이다.[2]
그의 아버지는 경찰관이었으나, 보신 전쟁 때 도쿠가와 막부와 오우에쓰 열판 동맹을 지지했기 때문에 더 높은 정부 직책을 얻지 못했다. 잦은 전근으로 이사를 많이 다녔다.
어린 시절 이시와라는 난폭한 성격이었지만 영리한 면도 있었다. 학교 교장이 이시와라에게 시험을 보게 하자 1학년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며, 3학년 때에는 독서, 산수, 작문 성적이 뛰어났다. 또한 병약하여 홍역에 걸려 종두를 여러 번 맞기도 했다.
이시와라는 어린 시절부터 근처 아이들을 모아 전쟁 놀이를 했고, 초등학생 친구가 장래의 꿈을 묻자 "육군 대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2. 2. 군사 교육
야마가타현 출신의 이시와라는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1909년 육군사관학교를 21기로 졸업하였다.[2] 한일 병합 이후 조선에서 근무하였으며, 1918년 장교의 출세 코스인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그는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에서 최상위권의 성적을 거두었으며, 휴가나 방학도 반납하고 독서를 할 정도로 학습에 열심이었다.1902년(메이지 35년), 쇼나이 중학교 2학년 중퇴 후 센다이 육군 지방 유년 학교(예과)에 합격하여 입교했다. 이시와라는 여기서 총원 51명 중 1등의 성적을 유지하며 학업은 우수했지만, 기계 체조나 검술 등의 운동은 서툴렀다.
1905년(메이지 38년)에는 육군 중앙 유년 학교(본과)에 입교하여 기본 교련, 무기 분해 및 조립, 승마 연습 등의 교육 훈련을 받았다. 다나카 지가쿠의 『묘법연화경』(법화경)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성적은 센다이 지방 유년 학교 출신자 중 최고였다. 또한, 도쿄에 거주했기 때문에 노기 마레스케나 오쿠마 시게노부의 사저를 방문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1907년(메이지 40년),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 구대장에게 반항하거나 모욕하는 등 생활 태도가 좋지 않아 졸업 성적은 관보에 따르면 418명 중 13등(보병과에서는 8등)이었다.
1910년(메이지 43년) 5월, 육군사관학교 21기 보병과를 졸업한 후,[2] 조선 주재 보병 제65연대에 복귀하여 견습 사관 교관으로서 매우 엄격한 교육 훈련을 했다. 여기서는 군사 잡지에 게재된 전술 문제에 답변을 투고하는 등 학습했지만, 미노와키 모토하치의 『서양사 강화』나 가케이 가쓰히코의 『고신도 대의』 등 군사학 이외의 철학과 역사 공부에도 힘썼다.

연대장의 명령으로 육군대학교 시험에 합격하여 다이쇼 4년(1915년)에 입교하였다. 여기서는 전술학, 전략, 군사사 등의 교육을 받았다. 1918년(다이쇼 7년), 육군대학교 30기를 차석으로 졸업했다(졸업생은 60명).[2] 수석은 스즈키 리치미치였다. 졸업 논문은 호쿠에쓰 전쟁을 작전적으로 연구한 『나가오카 번사 가와이 쓰구노스케』였다.
2. 3. 독일 유학
1922년부터 1925년까지 독일에 주재무관으로 파견되어 군사 역사와 전략을 공부했다.[12] 독일의 전직 장교들에게 개인 교습을 받으며 유럽 전술 이론의 전문가가 되었다.[12] 그는 니치렌슈(日蓮宗)의 신자가 되었는데, 그 교리에 의해 일본이 다가올 세계 대전 이후의 황금시대에 세계 중심이 될 것임을 확신했다. 그리하여 그는 일본이 황인종의 중심이 되어 백인종의 시대를 종식시킨다고 믿게 되었다.[12]2. 4. 니치렌 불교와 신념
이시와라는 독일 유학 전에 니치렌 불교(니치렌슈)에 귀의하여 종교적 신념을 갖게 되었다.[4] 니치렌은 '[일본은] 인도, 중국, 그리고 팔만 개의 다른 나라보다 우월하다'고 가르쳤으며, 비록 퇴폐 시대가 도래했지만, ''법화경''을 믿음으로써 희망이 있으며, 일본은 ''법화경''의 가르침이 우세해지고, 여기서부터 세계의 나머지 지역으로 전파될 땅이 될 것이라고 가르쳤다.[4]이러한 니치렌의 가르침에 따라 이시와라는 일본이 세계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는 일본이 황인종의 중심이 되어 백인종의 시대를 종식시킨다고 믿었다. 그는 "일본은 자국의 국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의 구원을 위해 승리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7]
3. 만주사변
이시와라는 육군 대학 교관을 거쳐 관동군 참모로 만주에 파견되었다. 1931년 9월 18일, 남만주철도 선로에 폭탄을 설치하고, 중국 군인의 공격으로 위장하여 류탸오구의 중국군 병영을 점령했다. 이후 혼조 시게루 관동군 사령관이나 도쿄의 일본 육군 참모 본부에 알리지 않고 만주 도시들을 점령하도록 명령했다.
이러한 만주 침략은 일본 정치 지도자들을 경계하게 했고,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이시와라는 불복종으로 처벌받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작전 성공으로 우익 청년 장교와 국수주의 단체로부터 대담성과 주도력을 인정받았다.
3. 1. 만주사변 주도
이시와라는 관동군 참모로 만주에 파견되었다. 1928년 장쭤린 폭사 사건 몇 달 후 만주에 도착한 그는 중국 동북부(둥베이) 지역의 힘의 공백 상태를 인식하고, 이를 이용하여 만주 지배를 위한 책략을 꾸몄다.[17]1931년 이시와라와 이타가키 세이지로는 일본의 남만주 철도회사의 철도를 폭파하는 자작극을 꾸몄다. 이를 기화로 본국 정부, 육군, 관동군 상부의 허가조차 받지 않고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였다.[17] 이시와라는 약 1만여 명의 병력으로 23만 명의 장쉐량의 중국 동북군 병력을 무력화시키고 만주 전역을 일본군의 손에 넣는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였다.[17] 그리하여 일본의 괴뢰 국가인 만주국이 성립되었다.[17] 이러한 독단적 행위는 국제적으로 큰 문제를 야기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우익 청년 장교들의 우상이 되었고 처벌받지 않고 승진하여 센다이 주둔 제4연대 연대장이 되었다.[17]
3. 2. 만주국 건국 이념
이시와라는 만주국 건국 과정에서 '왕도낙토'(王道樂土)와 '오족협화'(五族協和)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19] 그는 만주를 일본, 중국, 만주를 아우르는 '동양의 미국'과 같은 형태로 구상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은 일본의 국익과 최종 전쟁 준비를 위한 것이었다는 비판을 받는다.[19]4. 동아연맹과 세계최종전쟁론
1935년 이시와라는 육군 참모부 작전 부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일본을 중심으로 만주, 중국, 그리고 아시아 각국의 연맹체인 동아연맹을 구상했고, 이를 위해서는 소비에트 연방(소련)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소련을 패배시킨 후, 서양 각국의 식민지인 동남아시아로 진출하여 "해방"시키고, 이후에 미국과 대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시와라는 일본이 모든 정당을 하나로 묶고 군사 국가를 표방하는 일당제 국가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과 유사한 신념을 가진 청년 장교들에 의한 쿠데타인 2·26 사건이 발생했으나, 그는 반란을 규탄하고 오히려 계엄사령부에서 반란 진압에 앞장섰다. 쇼와 천황은 이시와라가 만주에서 독단적인 행동을 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반란 진압에 앞장선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4. 1. 동아연맹 구상
1935년 이시와라는 육군 참모부 작전 부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일본을 중심으로 만주, 중국, 그리고 아시아 각국의 연맹체인 동아연맹을 구상했고, 이를 위해서는 소비에트 연방(소련)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소련을 패배시킨 후, 서양 각국의 식민지인 동남아시아로 진출하여 "해방"시키고, 이후에 미국과 대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1]이시와라는 범아시아주의와 북진론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북진론은 일본이 만주국 및 중국과 연합하여 "동아시아 연맹"을 결성하고, 이후 소련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싸워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소련을 격파한 후 일본은 유럽 식민 통치로부터 동남아시아를 해방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 승리 이후 일본은 미국을 상대할 준비가 될 것이었다.[1]
한스 델브뤼크에게 영감을 받은 이시와라는 전쟁에는 장기전과 결정전의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제안했다. 일본은 미국의 지도 하에 서방과의 장기전에 대비하여 아시아를 자신의 지도 하에 통일해야 한다. 그는 최종 전쟁 전에 일본이 중국 지배권을 놓고 미국과 전쟁을 벌여 일본이 승리할 것으로 예상했다.[5]
이시와라는 세계적 갈등의 시대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고 느꼈으며, 일본은 ''국체''에 대한 비전과 중국을 "해방"하려는 신성한 사명을 바탕으로 통일된 동아시아를 이끌어 서방을 물리칠 것이라고 생각했다.[6] 그는 "일본은 자국의 국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의 구원을 위해 승리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7]
4. 2. 세계최종전쟁론
이시와라는 기술 발전이 전쟁의 역사를 결정하며, 결국 최종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저서 ''세계 최종 전쟁론''에서 기술이 전쟁의 역사를 결정하고, 전쟁의 역사가 역사를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곧 최종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이는 공중전으로 결정될 것이라고 예측했다.[3] 미래의 항공기는 새로운 동력원을 사용하여 거의 무한정 비행할 수 있으며, 다른 국가의 수도를 직접 공격하기 위해 먼 거리를 비행할 것이라고 보았다.[3]이러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일본은 도시를 해체하고 산업을 농업 공동체로 분산시켜 "농업과 산업의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3] 그는 "일본은 자국의 국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의 구원을 위해 승리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7]
최종 전쟁론이란, 전쟁 자체가 진화(전쟁 형태나 무기 등)하여 결국 멸망(절대 평화가 도래)한다는 설이다. 그 전제 조건으로 핵무기 수준의 "한 발로 도시를 궤멸시킬 수 있는" 무기와 지구를 무착륙으로 몇 번이고 돌 수 있는 병기의 존재를 상정했다(1910년경의 착상). 비유로 오다 노부나가를 들었는데, 조총의 존재가 일본을 통일로 이끌었다고 한다.
5. 2·26 사건과 우가키 내각 저지
이시와라는 1935년 일본 제국 육군 참모 본부 작전부장으로 임명되어 일본의 미래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명확히 할 수 있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는 범아시아주의와 북진론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이는 일본 제국 해군이 주장한 남진론과는 반대되는 입장이었다. 북진론은 일본이 만주국 및 중국과 연합하여 "동아시아 연맹"을 결성하고, 이후 소련과의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소련을 격파한 후 일본은 유럽 식민 통치로부터 동남아시아를 해방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 승리 이후 일본은 미국을 상대할 준비가 될 것이었다.[1]
하지만 이러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일본이 경제와 군사력을 증강해야 했다. 이시와라는 계획 경제를 갖춘 일당 "국방 국가"를 구상했으며, 여기서 정당은 폐지되고 부패한 정치인과 탐욕스러운 사업가들이 권력에서 제거될 것이었다.
그러나 이시와라는 쇼와 유신과 정부의 폭력적인 전복을 요구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1936년 2·26 사건이 발생했을 때, 반란군은 다수의 주요 정치인과 정부 지도자들을 암살하고 이시와라의 철학에 따른 정부의 변화를 요구했지만, 이시와라는 반란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여 그들의 희망을 꺾었다.[1]
5. 1. 2·26 사건 진압
1935년 이시와라는 육군 참모부 작전 부장에 임명되었다. 2·26 사건이 발생하자, 이시와라는 반란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계엄령 선포를 요구했다. 참모 차장 스기야마 하지메가 도쿄 주변 주둔지에서 병력을 철수시킨 후, 이시와라는 계엄 사령부 작전 참모로 임명되어 반란 진압에 앞장섰다. 쇼와 천황은 이시와라가 만주에서 독단적인 행동을 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반란 진압에 앞장선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1]5. 2. 우가키 내각 조각 저지
이시와라 간지는 군부 주도의 정치 체제를 만들기 위해 1937년에 우가키 가즈시게가 총리가 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이시와라는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를 이용해서 우가키 내각에서 육군대신이 임명되는 것을 방해했고, 결국 우가키가 내각을 구성하는 것을 좌절시켰다.[1]6. 중일전쟁 반대와 좌천
1937년 이시와라는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자신의 지론인 소련과의 전쟁에 방해된다고 생각하여 전쟁 확대를 반대했다. 그는 전선을 확대하려는 부하들과 갈등을 빚었으나, "각하께서 (만주사변에) 하신 대로 저희는 할 뿐입니다"라는 비웃음 섞인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이시와라의 확전 불가론은 육군 수뇌부와 마찰을 빚었고, 그는 중앙 요직에서 해임되어 관동군 부참모장으로 좌천되었다.
이시와라는 대동아 공영권 건설에 관심이 없고 지배자의 지위만을 누리는 관동군 지휘부를 비판하며, 관동군 장교들의 월급 삭감을 제안했다. 그러나 당시 관동군 참모장이었던 도조 히데키와 마찰을 빚어 해임당하고 교토시 근처 마이즈루의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일본에 돌아온 후에도 이시와라는 동아연맹을 위한 강연과 저술을 계속하며 중국과의 전쟁을 반대했다. 1939년 중장으로 진급하여 제16사단장이 되었으나, 앙숙인 도조 히데키가 승승장구하여 수상까지 오르자, 이시와라는 도조를 "국가의 적"이라고 공개 비난하여 군에서 강제로 예편당했다. 그는 도조가 남방자원 확보를 위해 미국과 전쟁을 불사하여 태평양 전쟁을 개시하자, "기름 때문에 전쟁을 시작하는 놈도 있나"라며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했다고 한다.[24]
이후 리쓰메이칸 대학 교수로 초빙되어 2년간 민간인 학생들에게 군사학을 강의하기도 했으나, 도조의 명을 받은 헌병대와 특별고등경찰이 그를 위험분자로 간주하여 감시했고, 학교에 압력을 가해 결국 물러나게 되었다.
6. 1. 중일전쟁 반대
1937년 이시와라는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자신의 지론인 소련과의 전쟁에 방해된다고 생각하여 전쟁 확대를 반대했다. 그는 전선을 확대하려는 부하들과 갈등을 빚었으나, "각하께서 (만주사변에) 하신 대로 저희는 할 뿐입니다"라는 비웃음 섞인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이시와라의 확전 불가론은 육군 수뇌부와 마찰을 빚었고, 그는 중앙 요직에서 해임되어 관동군 부참모장으로 좌천되었다.6. 2. 도조 히데키와의 갈등
1937년 3월 이시와라는 소장으로 진급하여 관동군 참모 부장으로 만주국에 복귀했다. 그는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자신의 지론인 소련과의 전쟁에 방해된다고 생각하여 이를 반대했다. 특히 그는 전선을 확대하려는 부하들의 발호를 막으려 했으나, 도리어 "각하께서 (만주사변에) 하신 대로 저희는 할 뿐입니다"라는 비웃음 섞인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이시와라의 확전 불가론은 육군 수뇌부와 마찰을 빚어 그는 중앙 요직에서 해임되어 관동군 부참모장으로 좌천되었다.이시와라는 대동아 공영권 건설에 관심이 없고 지배자의 지위만을 누리는 관동군 지휘부를 비판하며, 관동군 장교들의 월급 삭감을 제안했다. 그러나 당시 관동군 참모장이었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와 마찰을 빚어 해임당하고 교토 근처 마이즈루의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일본에 돌아온 후에도 이시와라는 동아연맹을 위한 강연과 저술을 계속하며 중국과의 전쟁을 반대했다. 1939년 중장으로 진급하여 제16사단장이 되었으나, 앙숙인 도조 히데키가 승승장구하여 수상까지 오르자, 이시와라는 도조를 "국가의 적"이라고 공개 비난하여 군에서 강제로 예편당했다. 그는 도조가 남방자원 확보를 위해 미국과 전쟁을 불사하여 태평양 전쟁을 개시하자, "기름 때문에 전쟁을 시작하는 놈도 있나"라며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했다고 한다.[24]
이후 리쓰메이칸 대학(立命館大学) 교수로 초빙되어 2년간 민간인 학생들에게 군사학을 강의하기도 했으나, 도조의 명을 받은 헌병대와 특별고등경찰이 그를 위험분자로 간주하여 감시했고, 학교에 압력을 가해 결국 물러나게 되었다.
6. 3. 예편과 리쓰메이칸 대학 교수
도조 히데키가 수상으로 취임하여 권력의 정점에 இருக்கும் 동안, 이시와라는 도조를 "국가의 적"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하여 군에서 강제 예편되었다.[1] 그는 도조가 남방 자원 확보를 위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기름 때문에 전쟁을 시작하는 놈도 있나"라며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했다.[1]이후 이시와라는 일본 민간인들의 군사 지식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리쓰메이칸 대학 교수로 초빙되어 2년간 민간인 학생들에게 군사학을 강의했다.[1] 그러나 그를 위험분자로 여긴 도조의 명령을 받은 헌병대와 특별고등경찰이 그를 감시하고 학교에 압력을 가하여, 결국 리쓰메이칸 대학에서 물러나야 했다.[1]
7. 태평양 전쟁과 말년
이시와라는 "기름이 갖고 싶다고 전쟁을 시작하는 놈이 있을까"라며 태평양 전쟁에 반대했지만,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시하라의 사태 타개책은 헐 노트와 거의 동일한 내용이었다.[20] 과달카날 전투 당시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의 요청으로, 이시와라는 과달카날 섬에서의 철수, 솔로몬 제도, 비스마르크 제도, 뉴기니 섬 포기, 사이판, 테니안, 괌 요새화, 공세 종말점 설정, 동남아시아와의 해상 수송로 확립을 통한 불패 태세 구축을 주장했다. 또한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사죄와 중화민국으로부터의 즉시 철병으로 동아 제국과의 연계를 꾀하며, 동아 연맹 협회의 미우 빈을 통해 평화의 길을 모색했으나, 시게미쓰 마모루와 요나이 미쓰마사의 반대로 실패했다.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요청으로 전범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였다. 그는 만주 침략의 주도자였지만, 태평양 전쟁을 주도한 도조 히데키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 전범 재판에 기소되지 않았다.[8] 그러나 그는 일본 민간인 폭격을 명령한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야말로 전범으로 기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전 후에는 자신의 주장을 바꾸어 일본은 무장 없이 세계 평화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예편 후에는 정치나 군사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저술 활동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알렸다. 1946년 가을부터 야마가타현 다카세 촌의 농장에서 살다가 1949년 8월 15일 방광암으로 사망했다.[9]
7. 1. 태평양 전쟁 반대
이시와라는 "기름이 갖고 싶다고 전쟁을 시작하는 놈이 있을까"라며 태평양 전쟁에 반대했지만,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시하라의 사태 타개책은 헐 노트와 거의 동일한 내용이었다.[20] 과달카날 전투 당시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의 요청으로, 이시와라는 과달카날 섬에서의 철수, 솔로몬 제도, 비스마르크 제도, 뉴기니 섬 포기, 사이판, 테니안, 괌 요새화, 공세 종말점 설정, 동남아시아와의 해상 수송로 확립을 통한 불패 태세 구축을 주장했다. 또한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사죄와 중화민국으로부터의 즉시 철병으로 동아 제국과의 연계를 꾀하며, 동아 연맹 협회의 미우 빈을 통해 평화의 길을 모색했으나, 시게미쓰 마모루와 요나이 미쓰마사의 반대로 실패했다.7. 2. 전범 재판과 사망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요청으로 전범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였다. 그는 만주 침략의 주도자였지만, 태평양 전쟁을 주도한 도조 히데키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 전범 재판에 기소되지 않았다.[8]그러나 그는 일본 민간인 폭격을 명령한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야말로 전범으로 기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전 후에는 자신의 주장을 바꾸어 일본은 무장 없이 세계 평화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예편 후에는 정치나 군사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저술 활동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알렸다. 1946년 가을부터 야마가타현 다카세 촌의 농장에서 살다가 1949년 8월 15일 방광암으로 사망했다.[9]
8. 평가와 영향
이시와라 간지는 뛰어난 군사 전략가이자 독특한 사상가로 평가받지만, 그의 사상과 행동에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는 만주사변을 주도하고 동아연맹을 주창하며 일본 군국주의에 영향을 미쳤지만, 한편으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반대하며 평화를 모색하기도 했다.
만주 사변 당시, 관동군의 창춘 주비 연대가 관동군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펑톈으로 향하려 할 때, 창춘 교외에는 수천 명 규모의 중국군이 존재하여 거류민들은 매우 위험한 상황에 놓일 수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창춘 거류민회 임원 오자와 카이사쿠(오자와 세이지의 아버지)는 관동군 간부에게 "거류민을 희생시킬 생각이었는가"라고 따졌지만, 이시와라는 "살을 베어 뼈를 끊는 전법이다"라고 대답하며 태연해했다.[38]
8. 1. 긍정적 평가
이시와라 간지는 한스 델브뤼크에게 영향을 받아 장기전과 결정전이라는 두 가지 유형의 전쟁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일본이 미국의 지도 하에 서방과의 장기전에 대비하여 아시아를 통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5] 또한, 만주 사변을 통해 일본이 역사적 사명을 깨닫기를 희망했다.[5]그는 세계적 갈등의 시대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으며, 일본은 국체에 대한 비전과 중국을 "해방"하려는 신성한 사명을 바탕으로 통일된 동아시아를 이끌어 서방을 물리칠 것이라고 믿었다.[6] 그는 "일본은 자국의 국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의 구원을 위해 승리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7]
이시와라는 저서 ''세계 최종 전쟁에 관하여''에서 기술이 전쟁의 역사를 결정하고, 전쟁의 역사가 역사를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래의 항공기가 새로운 동력원을 사용하여 거의 무한정 비행하며 다른 국가의 수도를 직접 공격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를 피하기 위해 일본은 도시를 해체하고 산업을 농업 공동체로 분산시켜 "농업과 산업의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3]
니치렌 불교 신자였던 이시와라는 법화경을 믿음으로써 희망이 있으며, 일본은 ''법화경''의 가르침이 우세해지고, 여기서부터 세계의 나머지 지역으로 전파될 땅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4]
만주 사변 당시, 이시와라는 창춘 거류민의 안전보다 군사 작전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보이며 "살을 베어 뼈를 끊는 전법이다"라고 말했다.[38]
8. 2. 부정적 평가
이시와라 간지는 만주사변을 주도하여 일본 군국주의의 팽창에 크게 기여했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는다.[38] 그는 인종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주의적인 면모를 보였다.[4][5][6][7][3]니치렌 불교에 심취했던 이시와라는 일본이 세계를 이끌어야 한다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었다.[4] 그는 '최종 전쟁'을 통해 일본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망상에 가까운 주장을 펼쳤다.[3]
만주사변 당시 이시와라는 창춘 주둔 일본군을 무리하게 이동시켜, 현지 일본인 거류민의 안전을 위협했다는 비판을 받았다.[38] 그는 "살을 베어 뼈를 끊는 전법"이라고 변명하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38]
도쿄 재판에서 이시와라는 만주국 건국이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며 전범으로 기소되는 것을 회피하려 했다.[39]
9. 관련 미디어
참조
[1]
웹사이트
陸軍人国記
https://web.archive.[...]
2006-05-02
[2]
논문
The Generals of World War II
[3]
논문
Nichirenism, Utopianism, and Modernity Rethinking Ishiwara Kanji's East Asia League Movement
http://web.tohoku.ac[...]
2015-12
[4]
논문
Nichiren and his nationalistic eschatology
https://www.cambridg[...]
1979-03
[5]
서적
Beyond Versailles: The 1919 Moment and a New Order in East Asia
2020
[6]
논문
Ishiwara Kanji and Japan's confrontation with the West
[7]
서적
Jews in the Japanese mind: the history and uses of a cultural stereotype
Lexington Books
2000
[8]
서적
Judgement at Tokyo
[9]
서적
The Tragedy of Great Power Politics
W. W. Norton & Company
2003
[10]
문서
元京城帝国大学教授高楠栄外二十名特旨叙位ノ件/陸軍中将安岡正臣外十八名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1]
간행물
宮廷錄事・勲章親授式
官報
1942-04-14
[12]
서적
関東軍
미상
[13]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事典
三省堂
2009
[14]
서적
2007
[15]
서적
국방론책
[16]
서적
昭和天皇独白録
[17]
서적
2022
[18]
서적
2015
[19]
서적
立命館百年史
1999
[20]
논문
Nichirenism, Utopianism, and Modernity: Rethinking Ishiwara Kanji’s East-Asia League Movement
https://web.tohoku.a[...]
2015
[21]
뉴스
時代の証言者
読売新聞
2017-04-03
[22]
문서
金子定一抄録十七集
1945-10-14
[23]
서적
昭和陸軍の研究
朝日新聞社
2006
[24]
잡지
昭和の陸軍 日本型組織の失敗
文藝春秋
2007-06
[25]
서적
蒋介石の密使 辻政信
祥伝社
2013
[26]
서적
石原莞爾研究
精華会中央事務所
1950
[27]
서적
2014
[28]
서적
石原莞爾全集
石原莞爾全集刊行会
1976
[29]
서적
2014
[30]
서적
石原莞爾全集
石原莞爾全集刊行会
1976
[31]
서적
石原莞爾選集
たまいらぼ
1986
[32]
서적
田中智学先生略伝
獅子王文庫
1953
[33]
서적
日蓮仏教の社会思想的展開 近代日本の宗教的イデオロギー
東京大学出版会
2005
[34]
서적
2014
[35]
서적
非常時! 陸軍を擔ふ人々
http://openlibrary.o[...]
普及社
2012-09-17
[36]
서적
昭和の名将と愚将
文藝春秋
[37]
서적
岡田啓介回顧録
毎日新聞社
1950-12-25
[38]
서적
アジア・太平洋戦争 同時代人はどうみていたか
岩波書店
[39]
서적
【図解】あの軍人たちの「意外な結末」
PHP研究所
[40]
뉴스
朝日新聞
1949-08-16
[41]
서적
新編庄内人名辞典
庄内人名辞典刊行会
[42]
서적
毅然たる孤独 石原莞爾の肖像
同成社
[43]
웹사이트
石原莞爾の実弟・六郎がテイ死去時に関係者に送った挨拶状
http://www.geocities[...]
2024-08-28
[44]
웹사이트
対中政策の現状と課題をめぐって ―議員外交の視点から―
http://iccs.aichi-u.[...]
愛知大学
2007-12-15
[45]
문서
Personnel records for ISHIHARA, Kanji, May 1946
[46]
문서
官報 1910年02月23日 叙任及辞令
[47]
문서
官報 1913年04月22日 叙任及辞令
[48]
문서
官報 1918年05月21日 叙任及辞令
[49]
문서
官報 第3301号「叙任及辞令」
1923-08-01
[50]
문서
官報 第535号「叙任及辞令」
1928-10-05
[51]
문서
官報 1932年09月08日 叙任及辞令
[52]
문서
官報 第3101号「叙任及辞令」
1937-05-08
[53]
문서
官報 第3912号「叙任及辞令」
1940-01-24
[54]
문서
官報 第219号・付録「辞令」
1913-04-25
[55]
문서
官報 第1900号「彙報-陸海軍-学生退校」
1918-12-03
[56]
문서
官報 第2426号「叙任及辞令」
1920-09-02
[57]
문서
官報 第4178号「叙任及辞令」
1926-07-27
[58]
문서
官報 第1636号「叙任及辞令」
1932-06-15
[59]
문서
官報 第3846号「叙任及辞令」
1939-10-30
[60]
문서
官報 第4438号・付録「辞令二」
1941-10-23
[61]
문서
官報 第3037号・付録「辞令二」
1937-02-19
[62]
이미지
石原莞爾 勲一位柱国章勲記
[63]
뉴스
一生懸命「勝手に」 中村倫也が演じる宮沢賢治 舞台「ケンジトシ」
https://www.asahi.co[...]
2023-01-2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